몽상 혹은 망상2007. 9. 21. 06:23



  풀벌레 소리가 가득한 이 어스름 속에서 흔들 흔들 시원한 바람이 창문을 통해 들이닥친다.

  이른 다섯시 반.
아직 동이 터오지 않는 것을 보며 한 해가 반이 넘게 지났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느끼고는
자조적인 미소를 입가에 띠워본다.

  '어떤 이에게는 세달 밖에 안남았고, 어떤 이에게는 세달이나 남았구나.'

  이런 저런 생각들을 조금 미뤄두고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새벽 바람을 쏘이며 '쓰으쓰으'
울려대는 풀벌레들의 연주에 귀를 기울여본다.

  '지휘자는 바람일까?'
  '어쩌면 저렇게 맛깔스럽게 연주하는 것일까?'

  일정한 리듬이 지속되면 지루할 법도 한데 그들의 연주는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가 않는다.
귀를 기울일 수록 그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도 각자의 개성을 뽐내며 연주를 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니까.


  한참을 눈을 감은 채 소리에만 집중하다 눈을 떠 보니 고새 하늘이 조금 밝아져있다.
하늘이 밝아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 저기 사람들의 소리-차가 지나가는 소리, 달그락거리는 소리, 쿵 하고 문을 닫는 소리, 끼이익 창문을 여는 소리 같은-가 그 영역을 넓혀간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이 있을 곳에 있겠지.
   ......그들은 확신을 가지고 있겠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 알기에 저렇게 움직이는 것이겠지?'

  잠시 방심한 틈에 다시 이런 저런 생각들이 머리 속으로 밀려든다. 그리고 그 생각들이
얽혀가며 여기 저기에 있는 감정들을 쑤셔대는 통에 혼란스러워졌는지 갑작스레 욕지기가
치밀어오른다.


  바람.
부드러운 바람이 어루만져준 덕분인지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어 하늘을 올려다본다.
시시각각 아침이 다가오고 있다. 눈으로도, 귀로도, 또 다른 감각으로도 명백히 날이 밝아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살아가야지. 응, 살아가야겠지.
  밝고 환한 아침을 대하기가 부끄러워도,
  내 스스로가 부끄러워 고개를 차마 들 수 없을 것만 같아도,
  또 하루는 시작되고, 사람들은 살아가고, 나도 살아가야겠지.
  응, 그렇게 살아야겠지.'

 
  응, 그렇게 살아가야하겠지.


Posted by 미우